국악

세종의 음악 뒤에는 박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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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를 대표하는 천재적인 인물들의 뒤에는, 그들의 인생에 함께하며 수많은 영향을 준 인물들이 있어요. 베토벤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할 수 있었고, 피카소는 자신의 아내를 보고 느끼는 감정을 그림에 담았죠. 이처럼 예술가들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특정 인물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방향을 정하기도 했답니다. 우리나라의 천재들은 어떨까요? 음악사에서 가장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세종 시대, 그 화려한 성공 뒤에는 세종의 음악적 조력자 난계 박연이 있었어요.

 

🎶온 동네를 울린 난계의 피리 소리

  고려 말기인 1378년, 현재로 따지면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바로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명인 난계 박연이에요. 박연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어요. 그는 특히 피리를 아주 잘 불었다고 전해지는데요. 그의 피리 소리는 온 마을에 퍼졌고, 마을 사람 모두가 그를 피리의 명수로 손꼽았을 정도로 피리 실력이 대단했답니다. 그런데… 피리만 잘 불었을까요? 아뇨, 박연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까지도 뛰어나게 연주할 정도로 음악적 열망이 가득 찬 사람이었어요. 그의 유년시절을 보면, 훗날 뛰어난 음악가가 되었을 것 같죠? 그러나 여기서 깜짝 반전이 있습니다. 그는 음악적 재능을 잠시 접어두고 관료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거든요. 1411년, 그는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합니다.

 

충북 영동이 낳은 악성(樂聖) 박연 선생 유적지를 가다
충북 영동이 낳은 악성(樂聖) 박연의 초상화 ©우리문화신문

 

😮천재가 알아본 천재! 세종과 박연

  관직에 진출한 뒤 박연은 국가 행정을 총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승승장구했어요.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우리나라 3대 악성에 속하는 음악이론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세종과의 만남이 박연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게 했답니다. 때는 1418년, 박연은 왕이 되려는 세자에게 글을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문학직을 맡았어요. 이때 박연이 글을 가르친 세자가 바로 세종(충녕)이었죠.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세종은 일찍이 박연의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세종은 왕위에 오른 뒤 박연을 조선 초기 음악 관장기관인 관습도감에 제조로 임명하여 음악에 전념할 수 있게 해주었어요. 이때 박연은 궁중음악인 아악의 이론을 연구하고 아악기를 연주하는 악학별좌의 임무를 맡았죠. 제4대 왕을 모시고 있던 당시 조선은 여전히 국가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개국 초기의 혼란을 겪는 중이었는데요. 유교의 덕목을 중시한 조선에서는 좋은 음악이 바른 정치를 이끄는 조건이라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세종이 음악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것이죠. 그래서 박연에게 음악 정비 사업을 추진할 것을 명했고, 박연의 본격적인 음악 작업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박연은 악기를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나 새로운 악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음의 기준이 되는 율관을 정해야 했죠. 율관은 음악에 쓰이는 율, 즉 기본이 되는 음율을 불어서 낼 수 있는 통을 의미하는데요.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옥타브를 12개의 반음으로 나누어서 12개의 율관을 만들어야 했어요. 율관을 제작하고 난 후에는 황종음을 정해야 했죠. 여기서 황종음이란 12율의 첫째 율이자 기준음이 되는 음이랍니다. 음악을 세우는 것은 국가의 표준을 세우는 것이기도 했기에 황종음을 정하는 부분에선 신중할 수밖에 없었어요. 황종음을 정하게 된 후 비슷한 시기에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에서 악기 편경 제작에 필요한 경석1)이 발견되었는데요. 이에 세종은 박연에게 조선의 아악, 즉 조선의 궁중음악을 위한 악기, 편경을 제작하라고 명합니다.

1) 경석은 옥돌이라고도 불리는 암석의 한 종류예요. 어떤 모습일지 잘 모르겠다고요? 생각보다 우리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돌이라고요! 풋파일을 떠올려보세요. 구멍 뽕뽕 뚫린 돌의 모양새 말이에요. 바로 경석의 모습이랍니다!

 

난계 선생을 통해 알게 된 국악과 국악기 - 오마이뉴스 모바일
구리통으로 만든 12율관 ©오마이뉴스

 

  편경은 같은 모양이지만 다른 음을 내는 16개의 돌로 이루어진 악기로, 습기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 조율의 표준이 되는 악기예요. 이 악기의 재료가 바로 경석인 것이죠. 박연은 천재적인 절대 음감을 바탕으로 편경을 만들었고, 이 편경은 세종 때 종묘와 영녕전 제사에 사용되었습니다. 이후 박연은 제례악이나 회례악 연주에 필요한 각종 악기를 제작했어요. 조선이 완전한 음악을 구현할 수 있게 된 건, 박연이 율관도 만들고, 기본음 황종음도 정하고, 악기도 만든 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세종대왕 앞에서 편경을 연주하는 모습 ©사단법인세종대왕기념사업회

 

  박연과 세종의 아악 정비 프로젝트가 순탄하게 이루어지던 와중에, 이 둘의 의견이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시 아악은 원래 중국의 황실 음악으로서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와 사용되던 음악을 의미했어요. 그렇기에 박연은 아악 정비는 원래의 음악, 즉 중국 음악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죠. 박연을 포함한 많은 신하들 역시 이에 동의했고요. 그러나 세종의 뜻은 달랐어요. 세종은 조선의 음악인 향악에 주목했죠. 결국 세종은 우리 음악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어요. 박연은 결국 세종의 뜻을 받아들여 혼재되어 있던 향악, 당악, 아악 등의 음악을 일관성 있게 정리해 나갑니다.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조사하고, 악기 보법 및 그림을 실어 악서를 만들었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중요한 악곡들을 모두 악보로 옮겨 출판하였고, 관현악 및 성악·무악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답니다.

 

✨박연의 호를 기억하며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본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본이름보다 호를 사용하는 것이 예의를 차리는 것으로 인식되었죠. 따라서 박연의 이름 앞에 난계라는 호가 붙여지게 되었는데요. 박연이 태어나서 활동하고 생을 마감한 곳인 충북 영동군에서는 바로 이 난계라는 호를 통해 국악을 알리고 있어요. 난계 박연의 음악적 업적과 예술적 혼을 기리기 위해 난계국악단이 만들어지고, 전국 난계 국악 경연대회가 영동에서 매년 진행되고 있죠. 심지어 그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할 수 있는 난계국악박물관도 지어졌고, 매년 영동군에선 난계국악축제가 열리고 있답니다. 이처럼 영동군에는 다양한 국악 인프라가 조성되어 있어요. 난계 박연이 태어나고 생을 마감한 지 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기억하기 위한 행보는 계속되고 있죠.

 

세종시대 인물을 만나다, 박연 편
박연의 영정을 모신 난계사 사당 ©교봉이
영동군, 영동난계국악축제...2021년 대한민국 공연예술제 지원사업 선정 < 충북 < 시·군·구(동) 소식 < 지역소식 < 기사본문 -  뉴스티앤티
영동난계국악축제 현장 ©뉴스티앤티
보기 난계국악박물관 > 국악 > 관광명소 > 문화관광">
난계국악박물관의 모습 ©영동군청

 

  박연은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해준 훌륭한 임금 세종을 만난 덕에 음악이론가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어요. 조선 음악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고자 했던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 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난계 박연! 세종대가 다양한 음악적 업적을 이룩하며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세종의 뜻을 따라 음악을 연구한 박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600년 전 음악이 지금 연주될 수 있는 것 또한 난계 박연 선생 덕분이 아닐까요?

 

 

 

ㅇ참고자료

- “박연, 아악을 집대성하다”, 우리역사넷

- “박연”, 한국고중세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2007

- “박연”, 인물한국사, 김정미, 2011

- 윤원진, “'예비 국악인 모여라' 전국난계국악경연대회 참가자 접수”, 뉴스원,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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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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