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

전통적. 그런데 이제 독보적, 파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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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한 전통’이란 무엇일까요? 다소 낯선 조합의 단어라, 평소에 생각하기는 쉽지 않은 주제 같아요. 문득 저에게 이 생각이 찾아온 것은 독일 연극, 그리고 전통연희에 관한 강의를 수강할 때였어요. 독일에서는 고대 서사시 등의 문학 작품 속 캐릭터와 스토리에 여러 가지 현대적 요소를 반영해 공연화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다채로운 시도들은 제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던 틀을 깨트렸죠. 전통연희 수업에서는 ‘추다혜 차지스’, ‘이날치 밴드’ 등 전통적인 이미지를 부수고 현대성을 더한 예술가들을 접했는데, 그 자유로운 모습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요. 이러한 타격은 제가 한국의 전통 예술에 더 주목하고 매력을 느끼도록 해주었답니다. 때문에 저는 건강한 전통이란 현대적 변용을 거치는 전통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뇌에 새로운 자극을 주어야 더 건강해지는 것처럼, 전통도 역동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신선한 공기, 즉 그 세대의 호흡을 공급받아야 하는 거죠. 결국 전통은 시대의 산물을 축적하며 나아가는 문화적 움직임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오늘은 지속적인 변화와 변신으로 한국 전통 무용의 틀을 깨며 한국 전통 예술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은 안무가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해요. 궁금하다면 다음 단락으로 같이 가보시죠!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에너지의 소유자!

  알록달록한 색감의 옷, 귀와 손을 장식한 화려한 액세서리, 그리고 민머리...? 강렬한 인상을 단번에 주고도 남을 이 분은 현대 무용가 안은미(1963~)입니다. 안은미 컴퍼니의 대표이기도 하죠. 그녀만의 색채가 강렬한 작품들은 그 작품성을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이미 여러 차례 해외 공연을 올리기도 했어요. 

  안은미의 독특한 에너지는 어린 시절부터 이미 싹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는 친구들과 놀 때 항상 시나리오를 쓰고 디렉팅 하는 것을 즐겼거든요. 혼자 있을 때는 집을 극장 삼아 1인 다역을 하며 모노드라마를 했죠. 계속 움직이기를 좋아하고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기는 힘들어하는 활동적인 아이였어요. 안은미의 패션과 작품들에서는 화려한 컬러들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요. 이런 그녀만의 시각적 감각이 그녀를 무용의 길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죠. 안은미는 다섯 살이 되었을 즈음 길거리에서 화려한 전통 복장을 입은 단체를 만났어요. 화려한 색감에 매료되었던 그는 재빠르게 달려가서 물었죠. “이게 뭐예요?” 그때 안은미의 귀에 처음으로 ‘무용’이라는 단어가 들어왔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색깔이 주는 힘을 그때 깨달았고 그런 것들과 함께라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죠. 그러나 당시 안은미의 집안은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무용을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았어요. 

  가족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본격적으로 무용을 하게 되었던 것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어요. 신이 난 안은미는 발품을 팔아 온 동네를 뒤지며 무용학원을 찾아다녔고, 한국 전통 무용이 뿌리인 학원을 발견합니다. 지금이라면 다소 무모해 보이는 방식의 학원 찾기인데요! 무용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기에 가능했던 거겠죠? 그는 중학교에 진학할 때도 학교에 무용실이 있는지부터 확인했어요. 학교 배정이 무작위였기 때문에 무용실이 있는 학교에 붙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다행히 무용실이 있는 중학교로 입학하게 되었지만 학교에서도 무용을 하려면 레슨비가 필요했어요. 녹록지 않았던 집안 사정을 알았던 안은미는 창문 너머로 무용 수업을 구경할 수밖에 없었죠. 이때 안은미만의 먼 거리 원칙 탐구법이 시작되었답니다. 그때를 회상하며 안은미는 비평적 관점과 객관성을 키울 수 있었던 시기라고 이야기해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기 때문이죠. 고등학교 진학 후 아는 언니로부터 현대무용은 맨발로 춤을 춘다는 이야기를 들은 안은미는 ‘맨발’이라는 단어에 눈을 반짝이며 현대무용에 환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면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상과 미지의 세계를 논의하는 등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열심히 입시를 준비했어요. 

 

현대 무용가 안은미 ©국악신문

 

🚨배움에 멈춤이란 버튼은 없다

  열렬한 담론의 장을 기대하며 대학에 입학한 안은미. 그러나 막상 대학에 입학한 안은미는 자신이 상상했던 세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방향과 맞지 않았던 수업 내용에는 실망했지만, 관심 있는 분야의 수업들을 마음껏 들었고 격변의 시기였던 80년대 대학가의 독특한 문화 환경을 실컷 즐겼어요. 1980년대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던 때잖아요. 당시 대학가에서는 통기타 치는 운동권 사람들, 카페 사장인 영화 학도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답니다. 안은미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수업에서는 논의할 수 없었던 세계를 배울 수 있었어요. 안은미 특유의 에너지는 대학 이후에 더 진지한 고민들과 맞물리며 빛을 발하게 돼요.

  안은미가 대학원생이었던 86년과 88년은 각각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개최되던 해였어요. 이전에는 이처럼 큰 국제 행사를 주관해 본 적이 없었던 대한민국이었지만, 대한민국의 문화 교류가 급속도로 빨라졌으며 자율성을 띠게 되었음을 증명한 사건들이었죠. 이때 안은미는 매스게임1)을 담당하게 됩니다. 군인, 대학생, 고등학생 등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인 500여 명의 인원을 인솔하고 책임져야 했죠. 안은미는 이 경험을  국제적으로 큰 규모의 행사에서 기술적인 것들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배울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고 회고해요.

1)  매스게임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하는 맨손 체조나 율동을 말해요. 경기장이나 공연장에서 저마다 다른 색카드를 들고 글자나 그림을 그리는 카드섹션, 아시죠? 이 카드섹션도 매스게임 종류 중 하나랍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88올림픽에서 선보인 매스게임 ©한국영상역사관

 

  게다가 88년도에 안은미는 개인 무용단을 만들기도 했는데요. 무용단이지만 무용만 할 것은 아니었기에 이름을 안은미 댄스 컴퍼니가 아닌 ‘안은미 컴퍼니’로 지었답니다. 이렇게 이름 사이에 공간을 두어야 그 빈칸에 변화되는 것들을 유동적으로 넣고 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작품을 짜는 일은 안은미에게 큰 즐거움이었어요. 어렸을 때 디렉팅 하기를 즐기던 성향과 잘 맞았거든요. 3분 정도의 작품이 끝나면 바로 다음 작품을 위한 연구를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고요. 그 과정에서 소품들과 음악 문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우리가 답습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등 작품의 크고 작은 틀을 짜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어요. 이때에도 역시 중학생 때부터 터득했던 원거리 원칙을 적용하려고 힘썼답니다. 그래야 더 분명히 보인다고 생각했거든요. 

  매스게임 지도 담당과 안은미 컴퍼니 창단 등 엄청난 책임감이 필요한 일을 대학 졸업 직후에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나아가 그 과정 자체를 배움의 기회로 생각하며 연구와 성장을 거듭한 모습이 정말 멋있죠. 이처럼 안은미는 안주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계를 맞닥뜨리고 그 너머로 나아가길 원했죠. 

  90년대에 이르러, 안은미는 한국 사회가 주는 위기감과 불안감을 크게 느끼고 가진 것 하나 없이 미국 맨해튼으로 떠나겠다는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한국 특유의 제도적 사고방식에 갇힐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죠. 한국 사회의 사회적 인식들에 대한 비판적인 고민도 있었고요. 아마 안은미의 사진을 본 이들은 그의 민머리를 인상 깊게 기억할 텐데요. 머리를 민 것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마주쳐야 하는 문제에 대한 의식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였어요. 그는 여성이 머리를 왜 밀었는지 질문하지 않는 사회로 떠났고, 현재까지도 자신이 단단해지는 동안 피신할 수 있었던 문화권이 미국이었다고 고백해요. 안은미는 자기 자신을 시험하고 싶었어요. 과연 익숙하지 않은 타문화권에서도 계속해서 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시험이었죠. 흔히 유학생들은 배움에 강박을 가지지만, 그는 문화적인 현상을 보러 간다는 마음으로 유학길에 올랐어요. 그래서 여유로움을 가지고 관찰하고 지켜볼 수 있었답니다. 중학생 시절, 창문 너머로 무용실을 봤을 때 길렀던 원근법적 통찰력이 다시 재현되는 순간이었어요. 이후 10여 년 동안 미국에 있으면서 다양한 문화권의 예술가들과 작업한 경험은 그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어요. 다양한 가치관과 서양의 빅 프로덕션 시스템이 굴러가는 방식, 다른 영역의 예술가들이 서로 어떤 언어로 소통하는지, 또 예술적 영역의 경계를 어떻게 허무는지 등을 배울 수 있었답니다. 미국 유학 에피소드는 안은미가 배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론을 찾아다니며 연구하는 예술가임을 명확히 알려줍니다. 

 

🤨전에 없던 무용? 오히려 좋아!

  안은미는 전통적인 무용 문법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많이 했어요. 동작을 보여주기보다 몸의 기능을 통해 에너지를 생산하고 그것이 관객들로부터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계산해서 던지는, 일종의 실험을 자주 실행해왔고요. 그의 실험적인 행보는 움직임뿐만 아니라 작품 창작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볼까요? 안은미는 <춘향전>의 서사가 항상 똑같은 것에 의문을 가졌어요. 그래서 그는 여러 해외 사례들처럼 서사의 구조를 바꾸고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춘향이를 노처녀로 설정하고 물에 빠진 남성을 춘향이가 구하는 서사로 뒤집어 수동적인 사랑이 아닌 긍정적인 사랑을 보여주고자 했죠. 그 작품이 바로 <新춘향전(2006)>이랍니다. 안은미는 한국이 전통을 건드리기 두려워함을 지적하며 그것은 진짜가 아닌 가짜 전통이라고 말해요. 전통이 변해야 건강한 것이고 이에 따라 문화적 사고의 유연성이 생긴다고 주장하죠. 또 시대가 많이 변했음을 짚으며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이 한국의 전통을 어떻게 이해할까에 대한 고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했답니다. 예술가들은 창의적인 언어들을 구축해 나감으로써 움직임이 있는 두터운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고 했고요.

  안은미는 전통을 넘어 움직임을 통한 인류학적 기록에도 관심을 가졌어요. 그렇게 기획된 것이 <몸 시리즈>였죠. 할머니 춤, 청소년 춤, 아저씨 춤 등 다양한 커뮤니티의 춤을 무대 위로 옮겨온 거예요. 이들의 춤은 조작된 춤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유의미하다고 여겼답니다. 어쩌면 관객에게 있어 나와 다른 사람으로만 여겨질 법한 이들이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춤은 그들의 몸에 밴 문화적 역사와 주체성을 보여주며 사람들 간의 경계를 허물었죠. 생각해보세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추시는 춤이 곧 나의 춤이 되는 그런 경험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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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공연된 <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중앙일보

 

  이 외에도 그는 시각장애인 프로젝트인 <안심 땐스(2016)>와 저신장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했던 <대심 땐스(2017)>등 장애에 대한 편견을 깨부수는 작업도 진행하며 다양한 무대적 실험과 시도를 이어나갔어요. 제도적, 사회적 현상들의 문제점을 알고 이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로 재탄생시켜 관객을 각성시키는 안은미의 활동은 예술의 가치와 힘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듯해요.

 

 <대심땐스>의 한 장면 ©안은미 컴퍼니 Facebook

 

💭안은미현재, 안은미래

  여러 시도와 경험들로 자신만의 방법론을 세우고 길을 개척한 안은미는 후배 예술가에게도 영향을 끼치는 멋진 예술 선배예요.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 중 대표적으로는 파격적인 패션과 전통, 그리고 현대를 융합한 독특한 음악 스타일로 주목받고 있는 소리꾼 이희문이 있죠. 안은미는 이희문에게 예술적 가치관을 심겨준 스승과 같은 존재였어요. 스스로를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왔거든요. 안은미는 자신의 무용가들에게도 헌신적이에요. 숙식도 책임질 정도랍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안은미 컴퍼니의 무용수는 안은미에 대해 ‘사람을 살리는 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후배들을 디렉팅 하는 안은미의 교육 철학도 굉장히 멋있는데요, 그는 절대 ‘너는 틀렸다’는 언어를 쓰지 않습니다. 대신 ‘나는 이렇게 해봤는데 이런 것을 느꼈어’라고 말하죠. 고정된 틀을 계속 격파하려던 행동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안은미는 선입견이 생기면 몸이 굳는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입을 여는 것을 꺼려했어요. 

  그리고 안은미의 고민과 공부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에요. 2021년 말 MMCA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안은미는 코로나 시기를 거치는 본인의 생각을 밝혔어요. 그는 이 시기를 예술계에 일어난 지각변동의 시기라고 보는데요. 철학자들이 고민하는 주제이자,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느끼고 논의하려던 ‘삶’의 구조와 지축이 흔들리는 시기라고요. 안은미는 그런 논쟁들에 대한 공부를 3년 정도 하고 싶다고도 밝혔어요. 지표를 말할 수 없는 무게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것을 현명한 방식으로 잘 이끈다면 인류의 새로운 이상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물음표도 던졌어요. 이럴 때일수록 우리 모두 정신 차리자고 하면서요!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안은미는 인류와 예술을 위해 평생 고민하며 살겠죠?

 

서울시립미술관 ‘안은미래’전에서는 안은미의 연대기를 그림과 글로 볼 수 있다. 바닥에 있는 공 속에는 안은미의 사진이 들어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안은미 데뷔 30주년 기념 전시 <안은미래> 전시장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Editor’s Comment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릴 때 나머지 열 개를 얻을 수 있어요. 그게 보여요.
버리기 쉬운 것을 버리면 작동을 안 해요. 쓰라리게 아픈 것을 버려야 해요.

  안은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에요. 저는 이 말이 안은미스러움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요. 여러분에게 쓰릴만큼 아픈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음… 아마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주거나 떠나야 하는 일이 가장 힘들 것 같아요. 그러나 안은미의 삶의 궤적을 보면 아픈 것을 버리는 행위가 새로운 모험을 열어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마냥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전통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지면 좋을 것 같을지 생각해볼까요? 전통을 비틀고 뒤집고 해체하고 다시 접합하여 탄생된 예술을 마주했을 때 힘껏 환영해주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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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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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 #안은미 #한국무용 #현대무용 #이희문 #안은미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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