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모르겠어… 하우에버! 죽겠다는 뜻은 아니야… 네버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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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우리가 당장은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들을 대신해주는 것 같아요. 그 덕에 우리는 알쏭달쏭한 문제에 골몰하지 않고 하루 일과에 충실할 수 있죠. 그런데 철학자들에게 전적으로 맡기기에는 우리 삶과 아주 밀접한 질문들도 있습니다. 삶 그 자체의 의미에 관한 물음들처럼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고민해 보신 적 있나요? 철학에 관심이 없더라도 이런 의문은 다들 한 번쯤 가져보셨을 텐데요. 명쾌한 답을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고 싶다는 뜻은 절대 아니란 말이죠. 왜 죽고 싶지는 않은 걸까요? 프랑스를 중심으로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 서유럽을 강타한 ‘부조리극’이 바로 이런 의문에서 시작했답니다.
🤨이제 우린 뭘 믿고 사는 거지?
일상에서 ‘부조리’는 이치나 도리에 어긋나는, 불합리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돼요. 하지만 오늘 살펴볼 ‘부조리’는 약간 다른 의미를 가졌어요. 부조리 사상은 제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에 등장합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전까지 그들의 삶을 지탱해오던 믿음에 의심을 품게 되었어요. 곧이어 전 세계를 이끌어오던 신념들이 속속들이 무너졌죠. 그중 하나는 종교와 신에 대한 믿음이었고요. 신을 향한 믿음에서 삶의 의미를 찾던 사람들은 이 믿음이 무너지자 혼돈에 빠졌어요. 더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를 알 수 없었거든요.
이때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가 등장해 ‘부조리’의 개념을 제시합니다. 우리에게 <이방인>으로 익숙한 그 카뮈 맞아요! 카뮈는 혼란 속에서도 인간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어요.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데 왜 자살하면 안 되는 걸까?”라는 질문의 해답을 구하기 위한 카뮈의 고뇌는 그가 발표한 부조리 3부작, <이방인>, <시지프 신화>, <칼리굴라>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그중 철학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 1942)에서 ‘부조리’라는 단어가 등장하며 그의 사상에 이름이 붙었답니다.
카뮈에 의하면 인생 자체에서는 삶의 의의를 찾을 수 없어요. 의의와, 목표가 없는 것이 부조리죠. 카뮈의 작품에서는 삶의 무의미성, 기존에 꿈꾸던 모든 이상의 가치 저하, 인간 소외와 같은 모습으로 부조리를 살펴볼 수 있어요.
😏내용이 부조리해? 그렇다면 형식도 부조리하게!
이 부조리 사상은 각종 예술계에 거대한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연극계 또한 이 흐름에 힘입어 ‘부조리극’을 탄생시켰죠. 부조리극에는 유달리 특별한 점이 있어요. 바로 부조리한 ‘형식’입니다. 부조리함을 이야기하는 작품인 만큼, 전달 방식 또한 부조리해야 한다는 것이죠.
부조리극은 전통적인 연극의 기본 규칙을 모조리 무시해요. 대체로 직선 구조, 혹은 순환 구조를 보이는데요. 쉽게 말하자면 발단과 전개, 절정과 결말로 극이 구성되고 전개되는 대신 평이한 흐름을 가진 것이 특징이랍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인 장면이 나타나거나 처음과 끝이 같은 양상을 보이기도 하죠. 그래서 서로 사건이 서로 연결되어 발생하기보다는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만 나열될 때가 많아요. 이러한 특징이 돋보이는 이유는 극의 시공간이 한정적이기 때문이에요. 부조리극에서는 단적인 상황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정체되고 고립된 하나의 시공간만이 배경이 되거든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두 무의미하죠.
부조리극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언어의 해체예요. 언어는 인간이 소통을 위해 만든 수단인데, 그 소통이 과연 잘 이루어지는지 의심하는 것 또한 부조리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랍니다. 인물들의 말이 곧 주제와 이야기를 전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다른 연극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이죠. 부조리극에서의 말이란 전달 능력을 잃은 채로 나타나거든요. 그러다 보니 인물들 간에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모든 대사가 독백처럼 보이기도 해요. 심지어는 헛소리 같기도 하죠. 부조리극에서는 언어보다 행위가 더 중요해요. 그래서인지 부조리극의 인물들은 과장되고 희극적인 몸짓을 할 때가 많은데, 이러한 특징은 황당하게 들리는 말과 합쳐져 부조리극만의 묘한 유머를 만들어 내요.
부조리극의 표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논리나 인과 관계에서 벗어나 있어요. 아주 생소한 형식으로 주어지기 때문에 이를 난해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고요. 하지만 이로써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자아내 관객의 경험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답니다.
😢죄수들도 오열하게 한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대표적인 부조리극으로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어요. 이 극은 여성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의 한 교도소에서 공연된 적이 있는데요. 죄수들이 지루해하거나 야유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를 치는 등 매우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고 해요. 이 작품의 어떤 점이 죄수들의 눈물샘을 자극한 것일까요?
부조리극에는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고 앞서 설명했는데요. <고도를 기다리며>도 마찬가지예요. ‘고고’와 ‘디디’ 두 주인공이 ‘고도’라는 존재를 한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죠. 극의 제목이 전체 줄거리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예요. 눈에 띄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요. 다만 ‘포조’와 ‘럭키’라는 이상한 행인, 그리고 ‘고도’의 소식을 전해주는 ‘소년’이 가끔 등장하죠. 하나의 장면 안에서도 언행이 반복되는데, 제1막과 제2막의 큰 흐름 또한 거의 같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저자인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는 아일랜드인이지만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사용해 작품을 썼어요. 심지어 자신의 작품을 영어로, 또는 프랑스어로 직접 번역하곤 했죠. 이에 대해 그는 “모국어보다 습득해서 배운 언어가 스타일 없이 쓸 수 있어 쉽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는데요. 이러한 언어 능력이 작품의 주제를 더욱 강조합니다.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의 입을 빌려 누구나 경험하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니까요.
난해하게 보일 수 있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기다림’이란 모두의 인생에 깃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고도’의 정체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극을 직접 쓴 베케트 또한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답했고요. 아마 고도는 희곡을 읽거나 연극을 보는 사람에게 각각 다른 존재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죽어야 한다고?
그래서 부조리극은 의미 없는 삶이 끝나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고도를 기다리며>를 처음 부조리극으로 이름 붙이고 이후로도 부조리극을 연구한 영국의 비평가 마틴 에슬린(Martin Esslin, 1918~2002)은 자신의 저서 ‘부조리극’에서 이렇게 말해요.
부조리극은 비록 수줍고 주저하면서이긴 하지만 웃고, 울고, 중얼중얼 노래하려고 애쓴다.
그 애씀은 신을 찬양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말로 할 수 없는 것의 차원에 도달하려는 시도다.
얼핏 보면 부조리극은 절망과 염세를 이야기할 것 같지만, 실은 우리가 더욱 적극적으로 살아가도록 힘을 줘요. 회의, 절망, 염세 이 세 가지 중 부조리극과 맞닿은 것은 딱 하나, 회의예요. 그것도 회의에 빠져 세상과 등지라는 게 아니고, 의문을 가지는 자세를 통해 현실을 직시하라는 거죠. 세상의 부조리를 깨달은 우리는 이제 현실에 품고 있던 환상에서 깨어나 부조리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어요.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삶에서 부조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부조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 파도에 휘둘리며 사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죠?
💬Editor’s Comment
부조리극은 삶 자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해요. 그렇다고 해서 삶에 의미가 없는 건 아니랍니다. 의미는 우리 안에서 찾는 것이거든요. 교도소의 죄수들에게는 교도소를 벗어나는 것이 삶의 의미일지도 모르니, 그들에게 고도는 석방일 수도 있겠네요. 여러분의 고도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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