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가톨릭의 명예 회복을 위해! 바로크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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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랄랄라 랄랄라~ 이 익숙한 멜로디,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죠? <플랜더스의 개>는 제 부모님 세대가 어릴 적 보던 애니메이션이에요. 영국의 동화가 원작인 이 작품은 1975년 일본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로 방영되었답니다. 국내에는 같은 해 말에 들여와 편성되었으니 정말 오래되었네요. 하지만 중독성 있는 주제가와 마지막 화만큼은 아직도 우리 마음에 깊게 남아있어요. 어느 추운 겨울날, 주인공 네로는 집세가 밀려 쫓겨나듯 나가게 되고, 추위와 굶주림에 오갈 데 없던 네로는 성당으로 향합니다. 그곳엔 네로가 평생 간절히 보고파하던 그림,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십자가에서 내림>이 있었죠. 화가를 꿈꾸던 네로는 그림을 보고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파트라슈를 껴안고 함께 얼어 죽게 된다는 결말. 저 역시 이 충격적인 엔딩을 잊을 수 없어요.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어쩜 이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해당 마지막 화는 세계명작극장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으로 남았죠. <플랜더스의 개>는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마지막 화의 그 장면 덕에 루벤스까지 이름을 알리게 되었어요. 루벤스는 실제로 플랑드르(플랜더스) 지역에서 활동하던 화가였는데요. 도대체 어떤 그림을 그렸길래 죽어가면서도 그 그림을 보고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걸까요? 루벤스가 살았던 바로크 시대의 미술을 소개할게요!

 

😤바로크 미술: 가톨릭 절대 지켜

  바로크는 사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때문에 생겨났어요! 바로크(Baroque)란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 이탈리아 로마를 시작으로 스페인, 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발전했던 전체적인 예술 특징을 이야기하는 말인데요. 이 바로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16세기경 유럽의 상황과 종교개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당시 유럽 교회는 로마 교황청의 부패한 생활, 권력 남용 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세속에 깊게 물든 시기였어요. 아무리 큰 죄를 짓더라도 교회에서 면죄부만 구매하면 죄를 씻을 수 있었죠. 이에 마틴 루터는 이러한 로마 가톨릭의 실태를 비판하며 그 유명한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어요. 그렇게 유럽에 개신교가 탄생하게 되는데요. 가톨릭은 새로운 물결에 두려움을 느껴 이를 저지하고자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를 소집해 개신교에 맞섰고, 이것이 곧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으로 이어졌답니다.

  이때 바로크 미술은 개신교의 등장으로 점점 밀리고 있던 가톨릭의 명예와 권위를 회복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신앙심을 심어 넣기 위한 일종의 정치 선전 도구로 떠올랐어요. 절륜한 미술 작품으로 감상자를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이죠. 한 시대의 예술 양식의 탄생이 정치·종교적 배경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 흥미롭지 않나요?

 

마틴 루터의 초상 ©Wikipedia

 

🎭무엇보다 더 드라마틱한 미술!

  재미있게도 바로크의 어원은 ‘찌그러진 진주’를 뜻하는 바로코(Barroco)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고딕(Gothic) 양식이 고트족을 비하하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인 것처럼, 바로크 역시 특정 시대의 미술 사조를 비판하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랍니다.

  바로크 미술의 주요 특징을 이야기한다면? 드라마틱(Dramatic)이라는 한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가톨릭의 목적은 그림으로 관람자의 마음을 움직여 큰 종교적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어요. 따라서 안정감 있는 구도를 중요하게 여겨 인체 비례를 정확하게 묘사했던 르네상스와는 다르게 역동적이고 극적인 연출로 보는 이를 매료시켰죠. 감성을 건드리는 접근법이었던 거예요. 이에 불안정하고 즉흥적이라는 특징이 나타나게 됩니다. 특히 빛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밝은 곳과 어두운 곳의 대비가 극명하고요. 색채 또한 화려하고 다채로워요. 풍부한 질감이 생동감 있게 드러나도록 그렸고요. 르네상스에 명료하게 표현하던 것들은 바로크 시대에 접어들어 모호하고 복잡하게 바뀌었답니다. 최근 현대 미술의 동향과도 닮아있는 것 같죠?

궁극적으로 바로크가 지향하는 바는 화면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독립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러나 관람객이 한순간이나마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지니는 장면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 전체를 의도 없이 그렇게 된 것으로 보이도록 할 것을 노린다.

  이 내용은 미술사의 기초 개념을 확립한 미술사가 뵐플린(Heinrich Wölfflin, 1864~1945)의 말인데요. 바로크의 즉흥성을 잘 설명하고 있답니다. 바로크 시대의 그림은 하나의 드라마로서 기능했던 거예요. 모든 사건이 우연에 기반해 일어나는 드라마처럼, 바로크 시대의 관객이 작품을 관람하는 순간 그 즉흥성이 실현돼요. 르네상스와는 확연히 다르죠.

 

<플랜더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사랑한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림> ©굿뉴스 가톨릭갤러리

 

🙄모두 같은 바로크가 아니야

  네로가 사랑했던 화가, 루벤스 외에 바로크 시대를 빛낸 인물에는 또 누가 있을까요? 바로크 시대의 서막을 연 화가부터 이야기해볼게요. 바로 이탈리아의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흔히 말하는 바로크 미술의 주요 특징이 곧 카라바조 그림의 특징일 정도로, 바로크를 설명할 때 꼭 필요한 인물이죠. 특히 <성 마태를 부름>은 바로크의 특징인 역동성과 명암 대비가 아주 잘 드러나는 작품이에요.

 

카라바조, <성 마태를 부름> ©INDIEPOST

 

  삼삼오오 식탁 앞에 모여 돈을 세고 있는 사람들 오른편에 손으로 누군가를 가리키는 사람이 보이시나요? 그는 바로 예수이고, 예수에게 불린 인물이 마태랍니다. 전반적으로 어두운 그림의 중앙을 관통하는 빛이 예수의 손짓 방향과 겹쳐, 마치 후광이 나는 것처럼 느껴지죠. 빛과 어둠의 대비를 극명하게 드러나도록 해서 극적인 연출을 완성한 거예요. 이러한 작품 특징은 이후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루벤스를 비롯해 많은 후대 유럽 화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주었어요.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조명을 받듯 빛을 받아 부각되는데, 인물에 생생함과 역동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였죠. 또 예수를 포함한 모든 인물이 현실적인 얼굴과 당대의 복장을 하고 있어요. 그림의 내용은 고귀한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등장인물은 평범한 민중으로 표현된 거예요. 종교적 사건을 우리 일상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죠. 이러한 특징 역시 로마 가톨릭의 의도에 맞아떨어지는 점이었답니다.

  카라바조는 유년 시절에 페스트로 가족을 잃었어요. 이런 경험 때문인지, 늘 죽음을 불안해하며 이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등 유달리 죽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본인도 겨우 30대 후반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담긴 그의 작품을 시작으로 유럽에는 하나의 새로운 미술 장르가 생기게 되는데, 바로 정물화예요. 이전에도 정물화는 있었지만, 카라바조를 시작으로 정물화가 하나의 단독 장르로 정착할 수 있었답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허무함과 덧없음, 죽음과 한없이 가까운 삶을 정물화에 녹여냈어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문구 들어보셨나요? 자신도 언젠간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죠. 카라바조는 이 문구의 의미가 담긴 소재들로 정물화를 그렸어요. 대표적으로 해골, 과일, 유리, 초, 시계 등 유한함을 나타내는 것들이죠. 이렇게 죽음의 의미가 담긴 정물화 장르를 일컬어 ‘바니타스(Vanitas)’라고 불러요. 그는 인생의 유한함을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그 속에 담긴 무한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

 

정물화의 시조 카라바조 : 네이버 블로그
네덜란드의 화가 페테르 클라스의 바니타스 정물화. 인생이 유한함을 의미하는 해골이 그려져 있다. ©Google Arts&Culture

 

  스페인의 바로크는 전개 양상이 살짝 달라요. 당시 스페인은 왕권이 아주 강력한 절대왕정 시기였어요. 따라서 미술이 종교가 아닌, 군주의 권력과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게 되죠. 스페인의 화가는 왕궁에서 왕가를 위한 그림을 그렸고요. 이를 궁정 미술이라고 하는데요. 당시 스페인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궁정 화가로 일한 인물이 바로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입니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 화가이자, 스페인의 대표 화가로 손꼽히는 인물이에요. 스페인 출신 화가, 하면 파블로 피카소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죠? 바로 그 피카소가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모작을 44번이나 그렸답니다. 그 정도로 벨라스케스를 존경하는 마음이 컸던 거예요.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왕실 소속으로 활동하던 시기, 유럽 각국을 오가며 외교관으로도 활동하던 벨기에의 루벤스는 스페인 마드리드에 머물게 돼요. 그곳에서 운명처럼 벨라스케스를 만났고요. 루벤스는 벨라스케스에게 이탈리아의 미술을 이야기해주었고, 이에 벨라스케스는 휴가를 내고 이탈리아로 가게 됩니다. 그때부터 그의 화풍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어요. 선의 디테일을 생략해 터치가 간결해지고, 색채와 빛을 통해 형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요. 벨라스케스 생애 최고의 걸작으로 불리는 <시녀들>에서 화풍이 바뀐 걸 알 수 있죠. <시녀들>은 스페인 바로크의 정수로 손꼽혀요. 가톨릭의 신비함을 나타내기보다는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 점이 바로크 미술의 처음 목적과는 사뭇 다르죠. 이렇듯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화가가 활동했던 지역, 개인 성향에 따라 여러 특색을 보인다는 점도 바로크 미술의 매력이랍니다.

 

시녀들,1656, 프라도 미술관
벨라스케스, <시녀들> ©한경닷컴

 

✨반짝 빛났다 사라졌지만… 네덜란드의 황금시기

  바로크가 유럽 전역으로 퍼지던 시기,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찬란한 황금시대를 지나고 있었어요. 무역, 선박업 등 상업이 발달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상인이 많았죠. 다른 국가에 비해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인식이 강했고, 정해진 계층도 따로 없었어요. 상류층과 하류층이 나뉘긴 했지만 각각 그들 나름의 문화를 향유했답니다. 궁정, 왕실이 화가의 후원자였던 다른 국가와는 달리, 부유한 대중이 미술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도 네덜란드 바로크의 특징이에요. 이러한 네덜란드의 황금기에 자신 역시 전성기를 보낸 화가가 바로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예요! ‘빛의 화가’로 불리는 그는 명암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대표작이 바로 <야경>이랍니다.

 

야경(렘브란트) - 나무위키
렘브란트, <야경> ©Google Arts&Culture

 

  어때요? 카라바조의 화풍과 닮아있지 않나요? 오늘날에는 <야경>이 렘브란트와 네덜란드 바로크를 상징하는 작품이지만, 사실 당시 그는 이 작품을 그린 이후 파산에 이르고 말아요. 민병대로부터 의뢰받아 그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그리게 되는데, 민병단 측에서는 각자의 개성이 멋지고 뚜렷하게 나타난 단체화가 완성될 것으로 기대했거든요. 그러나 렘브란트는 빛의 정도에 따라 누군가는 주인공처럼 밝게 조명하고, 누군가는 어둡게 그려 배경의 일부처럼 묘사했어요. 이 시기 렘브란트가 정형화된 바로크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깊은 내면을 담은 작품을 그리고자 했기 때문이죠. 당연히 의뢰인들의 반응은 좋지 못했고, 그 뒤로 렘브란트의 인기는 점점 더 떨어지게 돼요. 그렇게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어둠이 가득한 말년을 보내요. 갈수록 경제 사정이 어려워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게 돼요. 그의 그림은 윤곽선이 무너지고 경계가 모호해지는 급진적 자연주의 화풍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경제가 몰락하기 시작했어요. 대중은 그림을 살 여유가 없어졌고, 그림을 살 수 있는 건 오로지 여유로운 귀족뿐이었는데, 그들의 취향은 고전주의에 가까웠어요. 렘브란트의 변화한 화풍으로는 그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수 없었죠. 그는 결국 법원에 파산을 신청할 정도로 몰락하고 말아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렘브란트의 걸작으로 회자되는 작품들은 주로 그 시기에 탄생한답니다. 삶에 고통이 반복될수록 되려 그의 그림은 점점 더 훌륭해졌어요. 명암의 대가였던 화가는 그의 화풍과 마찬가지로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두운 말년을 보냈지만 현대에는 그의 작품이 수백억 대의 금액으로 거래되고 있어요. 바로크의 특징인 ‘드라마틱’이 가장 잘 어울리는 화가라고 하면 렘브란트를 꼽을 수 있지 않을까요?

 

  수용자의 태도와 해석이 중요하다는 점은 예술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죠. 당대 평론가들은 비난의 의미로 바로크라 이름 붙였지만, 이제는 조롱의 의미가 아닌 하나의 대명사로 쓰이는 것처럼요. 바로크 미술은 비록 성직자 고객들의 입맛에 맞춰 가톨릭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선전 도구로서 탄생했으나, 미술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다수 배출했어요. 매너리즘 시대에 비해 이해하기 쉽고 대중적인 바로크 미술은 민중을 위한 예술이 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현대인에게 사랑받고 있답니다. 

 

 

 

ㅇ참고자료
- 고종희, “가톨릭개혁 미술과 바로크 양식의 탄생”, 미술사학, 23, 347-375, 2009.
-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백낙청·반성완, 옮김)” 경기: 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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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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